대사기자는 사승의 일체이다.
위로는 ≪ 죽서기년 ≫, ≪ 춘추 ≫, ≪ 좌전 ≫, 중과 ≪ 자치통감 ≫, ≪ 속자치통감 ≫ 및 사전의 본기 등을 거슬러 올라갈수 있는데 이는 모두 년계사의 력사이며 기전체외에 특별히 ≪ 기년체 ≫ 라고 한다.후기의 방지는 대사를 한 눈에 기록하는 것도 없어서는 안 될 장절이다.본 대사기는 사지를 약취하여 다른 국적까지 언급하는 것으로, 필자가 본 바에 의하면, 토지에 따라 시험을 볼 때, 시간에 따라 일에 관계하고, 연차에 따라 편찬하고, 별도의 전문장을 세워 사승의 유문을 집대성하고, 역대 안문의 장고를 보존하여 독자들이 운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기원전
한 고조 2년
유방은 장군 한신을 파견하여 위나라 왕 표범 (표범)과 노표 (표범)를 크게 파하고 평양을 취하였으며, 위나라 왕의 모친과 부인을 얻었으며, 위나라의 모든 지역을 정하여 하동, 태원, 상당군에 두었다. [「 한서 (漢書) · 고조기 (高祖紀) 상 」에 보임.]태원군 (太原郡) 관할.(「 사기 (史記) · 고주기 (高祖紀) 3년 작 (作) 」.)「 한서 · 고조기 」.
기원전
한 고조 6년
정월, 운중 · 안문 · 대군 53 현립형 의신후 (義信侯) 유희를 대왕 (代王)으로 정하였다.(「 한서 (漢書) · 고성기 (高祖紀)하 (下) 」)에 의하면 시구에서는 산이 안문군 음관 (지금의 삭주시 변자제향리 인촌)에 속한다고 주하였다. 9월, 흉노는 한왕신을 마읍에서 포위공격했는데, 신이 흉노에 투항했다.(「 한서 (漢書) · 고조기 (高祖紀) 」, 「 통감 」)
기원전
한 고조 7년
흉노는 좌현왕 (左賢王)과 우현왕 (右賢王)의 기병 만여 명과 한왕 (漢王)의 신 (信) 왕 (王) 황 (王) 등을 시켜 광무 (廣武)에 침입하게하고, 남으로 진양 (晉陽)까지 공격하여, 한나라 병사와 싸웠지만 흉노는 패주하였다.(『 한서 · 한왕신전 』, 『 사기 · 한왕신전 』, 『 통감 』) 주발 (周발)과 번쾌 (번쾌)는 고조 (高祖) 로부터 한 (韓) 왕신 (王信)을 공격하였고, 하곽인 (何霍人) 지금의 번치 (번치) 현경 (縣境)에 이르며, 무천 (武泉) 북쪽에 있는 호마 (胡馬)를 공격하였다.(「 한서 · 번쾌전 」, 「 주발전 」, 「 사기 」와 동일) 같은 해, 한고조 류방이 한왕신을 격파하고 진양에서 련전하자 류경이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자 류경을 우광무로 만들었다.이에 주해 (朱解)를 지었고, 주해 (朱解)를 지었으며, 주해 (朱解)를 지었다.병사들의 손가락이 얼어 빠진 것은 10점 2점 3점.흉노에게 포위를 당한 평성 (오늘의 대동)은 7일후에 진평의 계략을 리용하여 탈출하였다.그는 다시 광무 (廣武)에 돌아와 류경 (刘敬)을 석석하고 회개하였다.(「 한서 (漢書) · 고조기 (高祖紀)하 (下) 」, 「 유경전 (劉敬傳) 」.)
기원전
한고조 11년
다루바 다루바 (herba herba)를 만나다.금년 겨울, 고조는주발을보내태원에도하며구주를지나서대신땅을정하였다.발나라는 말고을에 이르렀으나 말고을을 떠나지 않으면 공격하여 파괴하였다.(「 한서 (漢書) · 고조기 (高祖紀)하 」)
기원전
문제 기원전 14년
흉노의 노상 선우 (單羽)는 14만 기병을 거느리고 조나 (朝나, 감숙 고원 (古原) 동남쪽)와 소관 (少关, 고원 (古原) 남쪽)을 침탈하여 소란을 피웠다.문제가 군대를 파견하여 항전하자 흉노는 퇴각하였고 한나라 군대는 변새밖까지 쫓아왔으나 아무것도 얻지 못하였다.
기원전
한문제 후 6년
겨울에 흉노 3만명이 구름속으로 타들어가자 문제는 초나라 상소 (尚苏)에게 장군이라는 뜻을 가지고 주석을 걸어 호나라 (胡州)에 준비하도록 명하였다.(『 한서 · 문제기 』, 『 사기 · 문제본기 』, 『 흉노전 』)
기원전
한경제 중원 6년
6월에 흉노는 안문 (安門)에 들어가 무천 (武川, 지금의 무천)에 이르렀는데, 상군 (上郡)에 들어가 원마를 취하고, 관졸과 전사자 2,000명을 받아들였다. (「 한서 (漢書) · 경제 (景帝) 」)
기원전
한경제 후 2년
3월에 흉노가 기안문에 침입하자 태수 풍경과 싸우다가 죽었다.수레를 띄우고 재관을 기리며, 기러기를 문안에 모은다.(「 한서 (漢書) · 경제 (景帝) 」 · 「 자치통감 」)
기원전
한무제 원광 원년
겨울, 10월 (≪ 통감 ≫은 11월로 되여있다.) 위위 리광을 툰운중에서 용맹한 기장군으로 임명하고중위 정모 (郑武)는 기마장군, 기러기장군, 흉노를 방어하다가 6월에 끝났다.(「 한서 · 무제기 」 · 「 자치통감 」)
기원전
한 무제 원광 (元光) 2년
6월, 무제는 왕웅모, 어사대부 한안국 (韓安國)을 호군장군, 위위 이광 (李廣)을 용맹장군, 태복 공손하 (孔孫河)를 경거장차, 대행 왕회 (大行)를 장둔장군, 태중대부 이식 (李信)을 재관장군으로 임명하여 30만 군사를 둔마읍곡중에서 끌어들여 선우 (宣羽)를 공격하도록 유도했다.선우 (禪雨)는 선우 (禪雨)에 속하며, 선우 (禪雨)는 선우 (禪雨)에 속한다.장군 왕회는 주모에서 성공하지 못하고 투옥되여 죽었다.(「 한서 (漢書) · 무제기 (武帝紀) 」)
기원전
원광 5년
여름, 백졸을 보내 기러기문 (기러기문)을 다스리고 요새화를 막았다.(「 한서 · 무제기 」 · 「 자치통감 」)
기원전
원광 6년
봄에 흉노가 쳐들어와 관사와 백성을 약탈하자 황제는 수레를 파견한 위청 (魏青)을 상곡에서, 기장군 공손오 (孔孙ao)를 대신에서, 경기장군 공손하 (公孙賀)를 운중에서, 용맹한 기장군 리광 (李廣)을 기안문 (기안문)에서 각각 1만 기병을 몰아 호관시하를 쳤다.(「 한서 (漢書) · 무제기 (武帝紀) 」)
기원전
한무제 원삭 원년
가을에 흉노가 안문 (顔門)에 진입하여 안문군 도위를 패망시키고 3,000여명을 략살했다.무제는 수레와 기병 장군 위청을 기안문으로 내보냈고 장군 리식출은 대대로 수로 수천명을 사로잡았다.「 한서 · 무제기 」.
기원전
원삭 3년
6월, 흉노 수만명의 기병이 요새에 쳐들어와 대군 태수공우를 죽이고 기러기 문에 침입하여 약 천여명을 처단했다.(「 자치통감 」)
기원전
원삭 6년
2월, 대장군 위청 (衛青)이 6명의 장군과 10여만 기병을 거느리고 정양 (定陽)으로 출병하여, 흉노의 급수 3,000여 개를 쳐부수고, 환군하여 정양 (定洋), 운중 (雲中), 안문 (安門) 군에 휴말을 보냈다.「 한서 · 무제기 」.
기원전
무제 원조 사냥 2년
하 (夏) 사이에 흉노가 안문군 (安門郡)에 침입하여 수백 명을 살륙하였다. 이광 (李广) 등이 출격하여 흉노 3,000여 명을 죽이고 군대 4,000여 명을 모두 멸망시켰다.(「 한서 · 무제기 」 · 「 통감 」)
기원전
무제 천한 (天漢) 3년
가을에 흉노가 안문군 (安門郡)에 들어오자, 태수는 감히 막아내지 못하고 겁에 질려 도시를 버렸다.(「 한서 · 무제기 」 · 「 통감 」)
기원전
천한 4년
흉노가 안문 (安門)을 교란하자 무제는 이광리 (李光利), 노보덕 (魯博德), 조정설 (조정설), 공손오 (孔孫오는) 등 21만 대군을 이끌고 길을 나누어 영격하도록 명하였다. 이광리의 군대는 흉노와 10여 일간 교전했지만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했다. 공손오는 우현왕 (右賢王)에게 패하고 한나라 군대는 할 수 없이 퇴각했다. (천한 (天漢) 4년) 봄에 두 사단 장군 공손오만 (孔孙오만)과 보병 3만 명을 보내 기러기 문으로부터 흉노를 진격시켰으나 불리하여 다시 이끌었다.(「 한서 · 무제기 」 · 「 통감 」)
기원전
선제시초
흉노는 10여만기병 (騎)을 대파하여 남방에 새겨 들어와 도적으로 삼으려 하자, 조충국을 보내 툰연 변의 9 군 (郡)과 선우 (仙雨)를 문지 (文志) 하여 데리고 갔다.(「 한서 · 조충국전 」)
기원전
한원제 원년
왕소군은 흉노 호한여 선우에게 시집가서 악씨로 되였다.(한서 (漢書)에 기록되어 있다.)
기원 후
동한 광무제 건무 5년
노방은 스스로 한 (漢) 이라 칭하고 흉노에게 의탁했으며, 12월에 구원군 (九原郡)에서 스스로 천자 (天子)라 칭하고, 오원 (五原), 북방 (北方), 운중 (雲中), 정양 (定洋), 안문 (安門) 등 5개 군을 약탈했다.(「 후한서 · 로방전 」)
기원 후
건무 7년
광무제 (光武帝) 류수 (劉秀)는 중견 장군 두무 (杜武)에게 병사를 이끌고 진양 (晉陽)과 광무 (廣武)에서 둔전을 하여 흉노와 루팡 (魯芳)에 대비하게 하였다.(「 후한서 · 두무전 」)
기원 후
건무 9년
황제는 대사마인 오한을 보내 왕상 등 4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로방의 장군 가람을 고류 (지금의 양고현)에서 공격하게 했으나 불리하게 싸웠다.표기 대장군 두무 (杜茂)와 안문 태수 곽량 (郭亮)이 노방 장군 윤인번치 (尹仁번치, 지금의 혼원현 서쪽)를 공격하고, 가람 (賈람을)이 오랑우탄 기병 1만여 명을 이끌고 그들을 구하자, 무력으로 싸웠다가 패하자, 루번성 (樓번성)으로 끌고 가 안문 관리들을 태원으로 천거시켰다.(「 후한서 · 광무제상 」, 「 두무전 」)
기원 후
건무 12년
현자 단충 (丹忠)을 파견하여 형벌을 늦추어 (죄인을 감형함), 감형한 죄인을 두무 (杜武) 진 (鎭) 북쪽에 배치하게하고, 또 변방을 보내 정자와 보루를 쌓고, 봉화를 올리게 하는 등 변방의 준비를 강화하도록 하였다.(「 후한서 · 두무전 」) 안문군 (安門郡) 사람인 가단 (賈丹), 곽광 (霍光), 해승 (解勝) 등은 노방 (魯方) 장군 윤유 (尹有)를 략략하게하고, 장군 (將軍)을 대신하여 평성 (平城)을 지키다가 패전 (勝傳) 하여 윤유 (尹有)를 모두 죽이고 안문태수 곽량 (郭良)에게 항복시켰으며, 상소를 받아들여 모두 열후 (列侯)로 봉하였다.(「 후한서 · 두무전 」)
기원 후
건무 15년
2월, 안문 (顔門), 대군 (戴郡), 상곡 (上谷) 세 군민을 상산관 (常山關)과 거용관 (居容關) 동쪽에 배치하였다.(「 후한서 · 광무제기 」.
기원 후
건무 26년
운중 (雲中), 오원 (五原), 삭방 (朔方), 북지 (北地), 정양 (定阳), 안문 (顔門), 상곡 (上谷), 대군 (大郡) 등 8 군 (郡)의 백성들이 본토에 귀의하였다.현자 (賢者)를 알현하여 현자 (賢者)를 알현하고 현자 (賢者)를 알현하다.